원자력 그린본드와 CF100
최근(2025년 3월) 한국수력원자력(이하 한수원)이 아시아 최초로 그린본드(녹색 채권)의 성공적인 발행 소식을 알렸습니다. 글로벌 자본이 대한민국의 원자력 기술의 R&D에 투자를 결정한 셈입니다. 한수원의 원자력 그린본드는 12억 홍콩달러(약 2,150억 원) 규모로, 홍콩과 싱가포르에 있는 글로벌 대형 투자기관들이 참여했습니다.
단순히 채권 발행 이슈로만 보면 외국계 금융의 대한민국 공기업 발행 채권 구매 정도로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해당 채권으로 조달한 비용의 사용처가 원자력 R&D라는 점은 기후변화 대응 측면에서 여러 가지 시사점이 있습니다.
과거와 달리 글로벌 유수의 금융기관들은 투자 척도로 사업성과 함께 도덕성, 사회성, 인도적 관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합니다. 대중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자칫 비인도적 기업이나 기술에 대한 투자가 이미지 훼손으로 이어질 수 있고, 정상적인 사업 지속성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화석연료 관련 개발 사업이 투자시장에서 사라진 것이 대표적입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화석연료 개발 사업 관련 채권은 가장 인기 있는 종목이었지만, 최근에는 관련 채권 발행은 물론 사업 추진을 위한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조성 사례도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글로벌 금융기관들 눈에 화석연료는 더이상 미래성이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돌아보면 위에서 언급한 원자력 그린본드 발행은 글로벌 금융기관들이 원자력을 미래 지속성이 있는 친환경 에너지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이는 기후변화대응의 한 방향인 CF100 이니셔티브에도 힘을 실어주는 부분입니다.
CF100은 ‘Carbon Free 100%’라는 의미의 기후변화 대응 중 하나로 최근 우리 정부가 관심을 기울이며 추진하는 방향입니다. ‘Renewable Energy 100%’을 의미하는 RE100과 유사하지만, 이보다는 조금 늦게 제안된 방향이며,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에 더해 원자력, 수소와 같은 무탄소에너지도 포함한다는 점이 큰 차이점입니다.
에너지 환경 업계에서는 기후변화대응을 위한 실천 방안으로 RE100과 CF100 중 무엇이 더 나은 선택인지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두 행동 중 무엇이 정답이라기보다는 현재 국제 정세에서 어떤 행동에 더 많은 국가와 이익단체가 참여하느냐가 중요합니다. CF100의 탄생 배경도 RE100 달성에 실질적인 장벽들이 거론되면서 보다 현실적인 대안으로 나온 것입니다.
기후변화 관련 세계적으로 가장 큰 협의체인 ‘UN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도 수십년간의 회의를 진행해 오고 있지만, 핵심 국가인 미국과 중국의 미온적인 태도에 힘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취임 날 파리기후변화협정을 탈퇴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습니다. CF100과 RE100 역시 어느 가치가 더 올바르다는 논쟁이 아닌 힘 있는 주요국들의 선택에 따라 방향이 정해질 가능성이 큽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RE100보다는 CF100으로 방향을 잡고 있습니다. 환경론자 입장으로 얘기하면 ‘정도를 벗어나 쉬운 길을 택한 것’이고, 산업계의 의견을 빌리자면 “이상보다는 현실을 택한 것‘ 정도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정부가 CF100으로 방향을 잡은 이유는 지정학적, 산업 구조적 한계가 가장 큽니다. 대한민국은 에너지 네트워크 측면에서 독립된 섬과 같습니다. 유럽이나 아메리카 대륙과 달리 그 어떤 나라와도 전력망이 연결되어 있지 않고, 분단국가로 육로를 통한 자원 수급도 막혀있습니다. 의지할 곳 없이 오로지 자체적으로만 에너지를 생산하고 소비해야 합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제조산업 기반의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통 산업인 철강과 석유화학, 자동차는 물론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모두 전력 소비가 많은 산업군입니다. 그리고 국토 면적도 좁습니다. 재생에너지의 대표주자인 태양광과 풍력은 필수적으로 물리적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재생에너지 단지가 들어설 때마다 문제가 되는 지역주민들과의 갈등도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산악지형이 많고, 인구밀도가 높은 우리나라에서 대규모 재생에너지 단지를 조성하는 것은 난제입니다. 좁은 공간에 재생에너지를 가득 채운다 해도 경제활동에 필요한 모든 전력을 생산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따라서 재생에너지 100% 달성에 앞서 원자력과 수소 등을 활용해 무탄소 전원 시스템을 먼저 구축한다는 구상입니다.
CF100도 달성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CF100은 ’실시간(시간 일치성)‘이라는 개념을 중요하게 보고 있습니다. 국가에서 100이라는 에너지를 소비한다면 실시간으로 100이라는 에너지가 무탄소로 공급되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의 RE100보다 엄격한 기준입니다.
RE100은 기존 전력망 연결로 재생에너지 100% 사용을 검증할 수 없는 경우, △다른 시설에서의 재생에너지 생산 △재생에너지 공급인증서 구매(REC) 등으로 충당하기도 합니다. RE100 역시 실시간 무탄소 에너지 생산소비 구조를 갖추기 위해서는 CF100의 단계를 거쳐야 하는 셈입니다.
CF100과 RE100은 하나의 방법을 정하기보다는 두 가지 모두를 병행하며 상황에 따라 유연성 있게 대처한다는 자세가 중요해 보입니다. 그동안 RE100을 강조해 온 유럽에서도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이 탈원전 정책을 취소하고 회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유럽의 에너지 대란과 함께 제조업 경쟁력 하락이 겹쳤기 때문입니다.
특히, 대한민국처럼 국토 면적이 좁고, 고립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다양한 대안을 시도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전 세계적으로 배출되는 온실가스를 줄이고 지구 온도 상승을 억제하는 것입니다. 기업들이 우리나라에서는 CF100으로 원자력 등을 활용해 경쟁력을 갖추고, 여건이 좋은 해외 사업장에서는 RE100을 추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