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기술 < 절약·효율 향상
우상규 세계일보 기자
에너지가 없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난방, 동력, 전기 없이 하루를 지낼 수 있을까. 암울한 미래를 그린 애니메이션에서나 나올 듯한 세상이다. 에너지 사용에 익숙해져 버린 현대인이 자동차와 스마트폰이 없는 시대로 돌아가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우리나라는 자원 빈국이지만 세계적인 에너지 다소비 국가로 꼽힌다. 에너지소비는 세계 8위, 전력 소비만 놓고 보면 세계 4위 수준이다. 가정마다 자동차 한두 대를 갖고 있고 도심은 교통체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한국은 정보통신기술(ICT) 강국답게 첨단 가전은 물론이고 스마트기기 등 온갖 전자제품이 넘쳐난다. 이미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이런 생활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위기 상황에서도 이를 고집할 수 있을까.

주요국의 1인당 에너지소비량. 한국은 선명한 붉은 색으로 표시돼 있다. 우리나라는 인당
에너지소비량이 매우 높은 편에 속한다. Ⓒ OurWorldData / IEA
최근 전 세계가 에너지 가격 폭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원자재가격 상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로 ‘에너지 위기’가 닥치면서 세계가 신음하고 있다. 겨울이 시작되면서 유럽은 공포에 빠져들고 있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에 경제제재를 가하자, 러시아는 유럽으로 향하는 가스 파이프라인을 잠그며 보복에 나서고 있다. 에너지 가격 폭등은 물가 상승을 유발해 서민의 주머니 사정을 압박하고, 소비 여력을 갉아먹어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독일 전력회사들은 최근 소비자들에게 지금처럼 전기를 사용하면 요금폭탄을 맞을 수 있다는 경고문을 보냈고, 가스회사들은 ‘집 안 온도를 1도 낮추면 난방비 6%를 아낄 수 있다’는 안내문을 발송했다. 프랑스는 상징적 건물인 에펠탑의 조명을 지난 9월부터 에너지 절약 차원에서 예년보다 1시간 남짓 일찍 소등하고 있다. 영국은 에너지 규제기관인 오프젬을 중심으로 에너지 절약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중부 유럽 슬로바키아에서는 샤워를 2분 내로 끝내라는 지침이, 북유럽 핀란드에서는 전 국민이 즐기는 사우나를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하라는 권고가 나왔다.
먼 나라 얘기가 아니다. 우리나라도 에너지 비상 상황이다. 정부는 지난달 18일부터 강도 높은 ‘에너지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공공기관은 실내 난방온도를 기존보다 낮추고 경관조명을 소등하고 있다. 원가 상승분을 반영해 전기요금과 가스요금은 조금씩 올라 일반 시민의 부담도 늘어나고 있다.

정부에서 추진 중인 ‘에너지 다이어트’ 포스터 일부분
세계는 태양광, 풍력, 수력, 조력 등 재생에너지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지구온난화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에너지가격 변동에 따른 위험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기술 발전과 함께 재생에너지 발전 단가도 갈수록 낮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자연 여건이 그다지 적합하지 않아 고민이 크다. 현재 기술로는 발전 단가도 높은 편이다.
그런데 기존에 없던 혁신기술이 아닌 설계 자체의 변화만으로도 기후변화에 대응하고 에너지 효율을 높일 수 있다면 어떨까. 에너지 효율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에이머리 러빈스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는 지난 5월 세계일보와 세계비즈앤스포츠월드가 공동 주최한 ‘2022 세계에너지포럼’에서 이 방법이 효과적이라고 강조하며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레트로피트(retrofit) 프로젝트를 소개한 바 있다.
레트로피트는 건물이나 구조물의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개조공사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첨단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유리창 사이에 태양 복사에너지를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특수필름을 집어넣어 단열효과를 높인 결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레트로피트 이후 초반에는 기존보다 38% 에너지를 절감했다. 그 이후에는 43% 가량의 절감 효과를 보였고, 3년 안에 투자비용을 회수했다.
경험과 지식이 부족한 탓이겠지만, 기후나 에너지 관련 취재를 하면서 건축물의 설계 방식만 바꿔도 에너지 효율을 높일 수 있다는 얘기는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해결책은 먼 곳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국제에너지기구(IEA)도 ‘에너지 효율화’를 기후변화 대응과 탄소 중립 달성을 위한 ‘첫 번째 연료’(First Fuel)로 정의했다.
첨단기술이 아니라 절약이나 효율에 초점을 맞추면 개인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도 적지 않아 보인다. 며칠 전 방에서 일을 보다 잠시 거실로 나왔는데, 금방 돌아가려던 생각과 달리 소파에 앉아 TV를 보며 제법 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초등학생인 아이가 쪼르륵 달려와 “아빠 빈방 불은 꺼야죠” 하더니 전등 스위치를 눌러 껐다. 학교에서 ‘지구를 살리는 작은 실천’이라는 걸 배웠다고 했다. 무심코 해 온 행동들이, 아이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 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 ‘무지개’에 있는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표현이 문득 떠올랐다.